홍주 문화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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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읍성(洪州邑城) - 사적 제231호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둘레는 약 800m이다. 동문인 조양문()과 성 안의 홍주아문(), 그리고 주변의 산성()을 포함한다. 백제시대의 주류성()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처음 축조된 연대가 확실하지 않고, 고려시대에고쳐 쌓았다는 기록도전하지 않는다. 다만『세종실록지리지(錄)』에는 둘레가 533보 2척이고,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새로운 규식()에 맞추어 각 지방의 읍성을 고쳐 쌓았다. 이 읍성도 1451년(문종 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벽은원래 있었던 것보다 물려 쌓았는데, 둘레가 4,856척이고, 높이는 11척이며, 높이 2척의 여장()이 608개 있었다. 적대() 24곳 중 6곳, 문 4곳 중 1곳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을 두지 않았다. 성 안에는 우물 2곳이 있었고, 성 밖에는 해자()를 파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문은 본래 3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현종 때 한계수()가 다시 수리하였고, 1824년(순조 24)에는 진장() 김계묵()과 홍주목사 이헌규()가 수리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홍주목사 한응필()이 조양문·경의문()·망화문() 등 3곳의 성문과 함께 관영()을 지었다. 조양문은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의 다포계 문루로, 흥선대원군이 조양문의 편액을 친필로 하사하였다. 지금의 조양문은 1975년에 완전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1978년 10월 7일에 강도 5°의 지진으로 인해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1979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1982년에 부분 보수를 완공하였다.

1906년에는 이 성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벌였다. 곧 1905년에 민종식(, 1861∼1917)·이세영(, 1869~1938)·채광묵(, 1850∼1906)·안병찬(, 1854~1921) 등은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5월 19일에 1,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6문의 화포로 홍주성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덕산()으로 쫓아냈다.

이 성은 특이하게 남문이 없고 북문에 문루가 없다. 특히 삼국시대∼조선시대의 치소가 있는 자리로 큰 변동이 없고, 조선 초기에 새로운 축성 규식에 의해 축조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연구와 보존의 가치가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성홍주읍성 [洪城洪州邑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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